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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을 위한 글

대전블루스 이야기, _ 대전역에서...

 

 

<지난주, 대전역에서 환승을 기다리던 중...>

 

(* Quote :

1959년 어느날 밤 12시 40분경, 산책 나온 듯한,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내 플랫폼 가스등 아래 머문다. 한 청춘남녀 커플이 두 손을 꼭잡고 눈물 글썽한 시선으로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북쪽에선 남자를 떠나 보낼 목포행 0시 50분 증기 기관차가 역을 향해 들어오고, ... 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되돌아가 詩를 쓴다.

대전블루스의 가사였다.

 

그 사내는 당시 신세기 레코드사 사업부 직원이었던 최지수씨로 지방출장을 위해 대전역 인근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최씨의 가사를 받은 작곡가 김부해씨는 블루스 Blues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 여의 작업 끝에 대전블루스를 완성했다. 가수는 블루스를 잘 불렀던 안정애로 정해졌고 녹음에 착수했다.

 

출반 3일만에 서울, 지방 도매상으로 부터 음반 주문이 쇄도했다. 대전 블루스는 야간 작업까지 강행, 신세기 레코드 창사이래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작사, 작곡가, 가수에게 특별 보너스 및 월급인상 혜택이 돌아갔다.

 

십수년이 흐른 뒤 이 노래는 조용필의 리바이벌로 세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몇 순배를 돌아가면 누군가 좌중을 헤치고 비척비척 일어나 소주병이나 막걸리병을 입에 대고 목청껏 부르던 노래가 대전블루스다.

피서철이면 대전역 광장에 몰려드는 젊은이들이 한잔의 술과 함께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즐겨 부르기도 한다. 술이 한잔 뒤따라야 제 목청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노래는 우리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잘 담고 있다. 아리랑, 관동별곡, 진달래 처럼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 (驛)을 내세워, 19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의 애환을 달랬다.

기다렸던, 혹은 오지 말아야 할 마지막 열차가 지친 철마를 이끌고 들어오는 역의 실루엣은 작가들의 단골 소재다. 1980년대에 나온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임철우의 중편소설 사 평역은 해방과 6.25, 조국 근대화에 멍든 민중들의 아픔을 역의 대합실을 통해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막차는 좀 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진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자리의 사과를. 만니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곽재구의 이 詩는 당시 대전발 0시 50분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분위기를 묘사한 듯 하다.

 

1959년 2월 제 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 40분에 도착, 다시 목포를 향헤 0시 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사람들이었다.

방학철에는 캠핑이나 귀향하는 학생들로 새벽열차가 북적대기도 했다. 0시 50분 열차는 지금 없다.  1년 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03시 05분발 열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레코드사 사장에 까지 올랐던 최지수씨와 김부해씨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가수 안정애씨만이 과거 영광을 뒤로하고 생업에 전념하고 있다.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선 지금도 쉰 목소리의 대전블루스가 흘러나온다.

Quote end :)

 

(*출처 : 전남대학교)
http://youtu.be/ca585Sx-XZw (안정애의 원곡)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밤~
나만이 소리 치며 울 줄이야~
아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